[Building Bridges] 미혼모와 입양인: 연결성을 보다

이번 8월, 수백명의 한국인 입양인이 세계 한인 입양인 협회(IKAA) 대회에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다. 3년마다 대회를 통해 전 세계 한인 입양인이 모인다. 참가자 중에는 나처럼 한국에 살거나 몇 차례 한국을 방문했던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다. 대회는 한인 입양인이 자신의 입양 경험에 대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이 대회 시기에, 서울에서는 학술대회나 영화제, DNA검사와 꽃만들기 워크샵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올 해에는 한인 입양에 대한 사회정치적 입장을 다룬 담론이 거의 없었다. 미네소타 공영라디오 뉴스의 카오미 고에츠는, 대회 참가자 중 일부는 일주일간 행사에 자신의 생부ㆍ생모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 입양 자체에 대한 논의를 원했다. 하지만, 이번 2016 대회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묻혀버리고 말았다.

제도화된 한인 입양은 해리와 버사 홀트로부터 시작된다. 오레건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백인 부부는 8명의 혼혈 한인 아이를 입양하고, 나중에는 세계 홀트 아동보호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홀트는 기독교의 가치를 지닌 기독 단체에서 아이들을 양육해 기독교 정신을 전파하고자 했다. 이는 후에 입양의 주된 제한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홀트는 입양을 희망하는 부모 중에 신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입양 절차를 거치지 않게 하는 “대리 입양”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곧 전문 사회복지사들이 이 대리입양 제도를 비난하였고, 이에 홀트는 표준적인 절차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유관 단체에 입양 절차가 확립되었고, 제도화된 국제입양이 정착되었다. 한인 국제입양에서 가장 공분을 사기 쉬운 대상은 패권주의적으로 거동하는 미국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입양 제도에 있어 한국 정부 자체의 역할에 입을 모은다. 1950년대 중반에는, 전쟁 중에 가족과 떨어진 아이들과, 혼혈아라는 이유로 버려진 아기들에 대한 사회복지 시스템이 전무했다. 학자 엘레나 김은 “이런 입양이 가능했던 것은 단지 미국인이 순수하게 입양을 원해서였던 것만이 아니라, 초기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입양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한국 정부에서는 높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입양을 사회복지시설 대신으로 이용하였다.

최초의 한인 입양 역사는, 사랑을 실천하고 전쟁 고아가 된 아이들을 살려낸 매우 인도주의적인 것이었다. 미국은 이 전쟁 고아를 위한 고아원을 지으려고 모금을 진행했다가 결국 벽에 부딪혔다. 그 사이 약 한 세기 동안 해외 입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휴전 협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입양이 “고아가 된” 아기와 아이들에 그들을 대체로 사랑하는 가족을 만들어줄 수 있음은 분명하나, 여기서 엘레나 김m은 이런 입양 시스템에 대해 “빈곤에 처한 한인 가족과 그 아이들의 삶을 일국의 안전과 외교적 목적을 위해 이용한, 강제적이고 표준화된 정책”임을 환기한다. 해외 입양은 남한에 있어서도 지정학적 유대 – 특히 미국과의 유대 – 를 단단히 다질 수 있는 한 방법이었다. 이 점은 입양으로 형성된 가족 유대감을 통해 한 국가의 처지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기존의 입양은 주로 혼혈 한국인이 대상이었으나, 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순수 한국인도 입양되기 시작하였다.

입양은 1950년대에 시작되어서 1987-1988년에 정점을 찍었는데, 북한은 1988 올림픽이 열렸던 이 시기 동안 남한이 아기를 계속해서 해외로 입양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한국은 더 이상 전후 시기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입양은 계속되는가? 지금까지 계속되는 원인은, 한국의 미혼모와 싱글맘들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낙인에 있다. 2009년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한국의 싱글맘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일단 미혼모가 되면, 사회에서는 비도덕적인 사람이나 패배자로 봅니다. 마치 큰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취급하지요. 그리고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는, 한국의 가부장적이고 혈통주의적인 사회적 관습에 그 몫이 있다. 전통적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집안을 따라서만 호적 등록이 가능하다. 이런 문화는 많은 미혼모와 그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을 심어주고, 미혼모가 아이를 입양되도록 내버릴 수밖에 없게 한다.

싱글맘과 미혼모가 이런 오명을 받는데에는 구조적인 요소도 작용한다. 애초부터 해외 입양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사회복지 체계를 대신하여 이루어졌다. 현재, 정부는 국내 입양자에 대해 월 85달러를 지급하지만 싱글맘에게는 그 금액의 절반만을 지급한다. 그 정도의 금액은 대부분의 싱글맘과 그 아이가 살아가기에 충분치 않다. 그리고, 사실상 아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토록 하는 어떠한 강제적인 의무도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협력하고 있다고 해도 엄마가 경제적인 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해외 입양이 일종의 사업이라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요소이다. 해외로 입양되는 한인 아기에 인당 평균 3만 달러가 주어진다. 입양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관계자에게는 분명한 이익이 아닐 수 없다. 입양 대행사는 한국의 미혼모에게 쓰인 오명을 이용해 돈을 번다. 이 제도를 없앤다면, 해외입양 대행사 직원의 생계가 단절될 것이다. 한인 아기에 대한 해외 수요가 있는 한, 한국은 계속해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사회에 잠재한 오명과 구조적 부당함을 유지할 것이다.

나와 내 쌍둥이 언니가 입양될 당시인 1994년, 내 어머니는 미혼모였다. 입양 서류를 보면, 당시 어머니는 임신 사실을 몰랐던 아버지와 재결합하고 싶어했다.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자 자녀가 있긴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 둘 다 결혼하진 않았다. 어머니와 재회해서 그 동안 내 삶에서 알 수 없었던 부분을 조명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지만, 어떤 문제에선 결코 답을 얻지못할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어와 문화 차이로, 과거를 묻기가 어려웠고, 불편했을 뿐 아니라 때로 일종의 결례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때로 고통스럽기도 했고, 과거란 어쨌든 어둡고 불명확할 뿐일 거라는 사실에 대해 분개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생모와 재회를 이어가며, 나를 잉태했던 그의 삶이나 진실 전체를 알 수는 없을 거라는 상실감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엄마가 같이 밥을 먹으러 가면 식당 직원은 궁금하다는 듯이 엄마에게 왜 두 딸이 한국말을 못 하는 것처럼 보이냐며 질문을 던진다. 그런 상황에서 보여지는 불편함 – 특히 엄마의 난처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과거에 대한 질문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를 떠올리게 된다. 언젠가 한국어 실력이 더 좋아지고 생부ㆍ생모들이 좀더 편하게 느껴지게 되면, 이런 불편한 대화를 좀더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려고 한다.

이번 여름 처음으로 대회에 참여하고, 내년까지 당분간 서울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전세계에 있는 수백명의 입양인에게 있어서, 진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큰 경험이었다. 이번 주 내내 이 단체의 공동성과 다양성에 감명받았다. 다른 입양인과의 대화에서 반복해서 나온 주제가 있다. 우리가 입양되지 않았더라면, 서로 결코 만날 수 없었으리라는 것. 입양을 통해 상실을 겪었고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야만 하게 되었지만, 그 또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공동의 힘과 회복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작성자: 릴리안 헥스터
번역자: 이주희(번역팀, ISC)

**본 글은 국제전략센터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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