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잊혀지지 않는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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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우소윤(세월호 3주기 기억과 다짐의 버스 참가단)

결코 잊혀지지 않는 날이 있다. 잊을 수가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날이 있다.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두 눈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이고 가슴이 조여오는 그런 날, 2014년, 4월, 16일. 벌써 3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정지된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도 깊은 트라우마가 생겼다. 304명의 세월을 품고 있는 거대한 선체가 바다속으로 완전히 잠기는 것을 생중계로 보았다. 영화보다도 더 참혹한 현실이 너무 끔찍하고 두려웠다. 세계가 작동하는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이 온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고, 아무것도 믿을수가 없고, 기댈곳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했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한참을 안산에 가지 못했다. 마치 졸업앨범처럼 펼쳐져 있는 안산분향소의 영정사진들을 차마 눈을 뜨고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작가가 말한 것처럼, 기필코 눈을 떠야만 했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세월호 3주기 하루 전날, 2017. 4. 15. 자정즈음, “기억과 다짐의 버스”에 올라탔다. 3년만에 드디어 세월호를 건져올렸다고 한다. 뉴스를 통해 보면서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버스에 올라탔고, 세월호를 똑바로 마주하러 갔다. 기억하기 위해서.

버스는 5시간을 달려 해가 뜨고 나서야 목포에 도착했다. 버스가 목포신항 부두가 도로에 진입했을 때, 차창 밖으로 모로 누워있는 배 한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월호였다. 4월 중순의 화창한 봄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낡아 바스라질 것 같은 세월호가 미처 진흙을 다 털어내지 못한 바닥을 드러내 보이며 누워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철제 팬스 사이로 세월호를 바라봐야 했다. 아주 가까이는 갈 수 없었다. 선체조사위원회 관계자, 조사 작업자, 경찰들만 세월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아직 세월호 안에 미수습자 9분이 있다. 저 거대한 배 안의 어디쯤에서 고단한 몸 누이고 있을까. 그곳에 빨리 찾으러 가야 하는데.. 목포신항에 마련된 임시거처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은 하루가 천년같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를 본 후, 버스를 탔던 사람들과 다 같이 모여 단원고등학교 2학년 8반 장준영 학생의 아버님 장 훈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었다. 장 훈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유가족들은 세월호 사건을 구조 실패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패는 최선을 다했는데 구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실패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해경은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객실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선을 넘어 한 발만 더 나아가서, “다 나오세요” 라고 외치면 되는데, 해경은 아무도 그 선을 넘어가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무엇이 바뀌었을까? 박근혜가 내려가고 나서야 겨우 세월호만 올라왔을 뿐이다. 아직도 왜 세월호가 바다속으로 잠겨야 했는지, 왜 304명의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했는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안전한 사회를 바라는 우리들의 열망은 더욱 간절해졌지만, 이 사회는 과연 무엇을 실천하고 또 이루어 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장 훈 님은 안전사회를 만들기 위한 징표로서 건져올린 세월호 선체를 잘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기에 힘을 실어달라고 이야기했다.

무엇보다도, 장 훈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장 훈님은 우리들에게 다섯 가지를 당부했다. “분노하세요, 기억하세요, 행동하세요, 연대하세요,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세요.” 분노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없고, 기억할 수 없으면 행동할 수 없고, 행동할 수 없으면 연대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왜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고 할까. 누구보다도 아프고 고단할 그가 우리들에게 웃음을 띄며 말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내 이웃도 사랑할 수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하루 3번 사랑한다 말하세요 여러분”

목포에 세월호를 남겨두고, 버스는 아이들을 만나러 다시 안산으로 향했다. 안산에 들어서서 만개한 벚꽃나무 가로수를 한참 지나치니 안산교육청 앞에 도착했다. 교육청의 별관에 단원고등학교 2학년 세월호 아이들의 교실, ‘기억교실’이 옮겨져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고, 1층부터 2층까지, 1반부터 10까지,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추모하는 글귀와 물건들이 가득했다. 나는 이번 목포행 버스를 올라타기 전에, 차분하고 담담하게 두 눈에, 마음에 가득 담고 와야지 결심을 했던 터라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교실 2학년 1반에 들어서는 순간,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들을 잊지않고 기억해주고 방문해주어 감사하다는 수연 아빠의 메시지, 예은이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는 ‘못난 아빠’ 유경근씨의 메모, 전수영 선생님 어머니의 이야기, 2학년7반의 생존학생 ‘1명’. 이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또.. 또.. 끝없이 이어지는 저마다의 슬픔과 고통들.

세월호는 건져올렸지만, 그래서 유류품은 돌아오고 있지만, 우리가 바라는 진실, 건져올린 진짜 진실은 아직 없다.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사회는 3년을 싸워왔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304명의 흔적을 더듬고 있을 뿐이다.

누워있는 세월호 앞에서 함께서울 김종민 대표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기억을 한다는 것은 역사의 어떤 한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역사의 한 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입장에 서는 것 인가 하는 문제이다. 일제 강점기, 군산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철선을 보고 어느 누구는 독립의 길을 선택하기도 하고 누구는 친일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누워있는 저 세월호를 보면서 어떠한 역사적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떠한 길을 걸을 것인가” 라고 물으면서, “다짐은 즉, 결심이다. 결심은 무엇인가를 잘라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세월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떤 적폐를 잘라버려야 하나, 이 사회의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귀중하게 여기는 어떤 것을 버려야 할까. 그것이 가능할 때 이 사회는 전진하고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과 다짐의 버스를 탄 이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다짐하여야 할까…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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